빨간색 광역버스에 백팩을 메고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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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 르네상스맨

스타트업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스타트업이 많아진다는 것은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고, 도전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선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 종류가 늘어나는 건 물론이고 내게 잘 맞는 기업을 찾을 가능성도 높아질 겁니다. 스타트업이 많아진다는 것은 제게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스타트업을 만드는 분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첫 회사를 다닐 때에는 출근 전이나 점심시간을 쪼개 스타트업얼라이언스 행사에서 창업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퍼블리를 구독하던 독자는 어느덧 4개의 리포트를 쓴 저자가 되었습니다. 스타트업을 만드는 분들의 이야기에는 자기만의 이유가 있었고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얼마 전에도 커피챗, 카페노노 그리고 얼마집을 만든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누구보다 1분을 아껴서 씀직한 창업가들이 제게 먼저 대화를 하자고 물어봐주시는 게 신기했습니다. 전략부터 운영까지 모두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낯선 이에게 대화를 청하는 모습이 놀라웠죠. 아무리 바빠도 들으려고 하는구나, 연결되려고 애쓰는구나. 한번 또 배웠습니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오픈이노베이션플레이어 글램핑 ©REDBUSBAGMAN
블루포인트는 초기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합니다. 동시에 초기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죠. 효율을 위해서 투자만 하는 경우도 많은데 자신이 투자한 스타트업이 잘 될 수 있도록 고민합니다. 일종의 공동운명체인데요. 이번에 블루포인트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오픈이노베이션플레이어 글램핑도 그랬습니다.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 투자담당자들과 스타트업 창업가, 그리고 저와 같이 스타트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만들었죠. 모여서 이야기하기 좋은 판을 깔았습니다. 주니어 때는 이런 '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확실한 안건이 있고, 목표도 분명한 자리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아서 애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에 가서 뭘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앞섰죠. 그런데 일을 한 지 12년이 넘어가고, 운 좋게 스타트업을 만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RoI(Return on Investment)가 확실하지 않은데 제게 대화를 청하는 것 자체가 의아했거든요. 1시간이란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UX 리서치가 왜 중요한 지, UX 디자인만 해서는 안 되고 리서치를 함께 해야 사용자에게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고 있는 서비스를 사용해 본 소감이 어떤지 물었죠. 그렇게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연결되는 기분이었죠.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오픈이노베이션플레이어 글램핑 ©REDBUSBAGMAN
이번 행사도 그랬습니다. 실리콘밸리부터 사막까지 역동적으로 연결되고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버닝맨처럼 누구라도 시도하고 실험할 수 있는 안전한 아지트가 서울에서 멀지 않은 청계산 산자락에도 생길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죠. 멍석을 깔아주면 막상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멍석을 깔아주면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들도 있죠. 버닝맨 티켓에 적혔던 polymat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박식한 사람. 르네상스 시대의 다빈치에게 어울리는 말이죠. 의미를 살리며 '르네상스맨'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게 아주 많고 그걸 다 하려고 바쁘지만 다 하지 못해 불안하면서도 행복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도움을 구하고 자극을 받는 장이었습니다. 잘 될 거라 믿지만 내가 꿈꾸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정답이 없는 것을 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였죠.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오픈이노베이션플레이어 글램핑 ©REDBUSBAGMAN
네트워킹이 한창일 때 저는 한 걸음 물러서 따뜻한 스프를 마시며 가만히 관찰했습니다. 행사가 마치는 밤 10시가 가까웠는데 경기가 한창인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제 눈에는 다들 갈증이 심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서울에서, 스타트업신에서 일하는 분들이니 이름 정도는 알고 있거나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알만큼 판이 좁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를 가장 바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교외에 함께 나와 찬 공기 속에 모닥불 같이 쬐면서 이야기할만한 시간을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오며 가며 들릴 수 있는 자리를 원했을까요?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됐거든요. 근데 오늘 그걸 알았어요". 스타트업에서 짧게 일한 경험이 있지만 너무 짧았습니다. 그래서 화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밖에 없어요. 스타트업에 계신 분들에게는 표본이 많지 않습니다. 표본을 겨우 찾았다 싶어도 결국 미국이고 실리콘밸리인 경우가 많죠. 거리감이 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표본을 찾고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일. 오픈이노베이션이라는 건 이렇게 표본을 늘리고 표본끼리 유대감을 갖게 돕는 일과 닮았습니다.
블루포인트파트너스 오픈이노베이션플레이어 글램핑 ©REDBUSBAGMAN
2주 후에는 협업솔루션 Typed를 만드는 비즈니스캔버스 우진 님을 만날 예정입니다.
Typed를 소개하는 표현 중 하나가 '자료가 지식이 될 때까지'인데요.
나만의 이유로 도전하는 르네상스맨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픈이노베이션으로 '연결이 채움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