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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거 자존감 문제 아니야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요인은 도처에 산재해 있고, 이것은 우리 뇌에 오래도록 상흔을 남깁니다. 많은 심리학자들과 뇌과학자들이 우리에게 그런 일이 생기는 이유를 추적해 왔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자존감이 낮아지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는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이하 ‘주 양육자’)의 방임, 무관심, 그리고 신체적᛫정서적 학대가 있습니다. 아이에게 맞는 정서적᛫물리적 환경을 제공하지 않거나 아예 병리적인 수준으로 아이의 마음에 깊이 침투해, 자녀를 제 뜻대로 조종하려는 주 양육자의 태도로 인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몹시 불안정해지는 겁니다.

가족 내 역동(Dynamics, 대부분 유년기 경험과 관련하여 비의식 수준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힘 혹은 내적 긴장 상태) 뿐 아니라 개인의 저조한 성취나 외부의 상활들 역시 한몫을 합니다. 친구나 애인을 사귀는 일이 몹시 어려웠거나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경우(낮은 사회적 성취), 혹은 원하는 직업을 얻지 못했을 경우(낮은 직업적 성취), 자존감은 낮아지기 쉽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내가 남들보다 현저히 낮은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또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정불화도 분명 아이의 자존감을 낮추는 원인이 됩니다.

공격을 받은 경험 역시 위험 요인입니다. 직접 공격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약자에게 가학적인 미디어 프로그램과 사회 분위기,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 그리고 이에 관한 외상적 경험들 역시 개인의 전 생애에 걸쳐 매 단계마다 자존감을 훼손하는 위험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위에 열거한 사건들은 뇌의 기능과 구조에까지 그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의 잘못된 양육, 성취 문제, 공격적인 환경에 노출될 때 뇌는 충분히 자라지 못하거나, 심지어 뇌의 부피가 줄어들기까지 합니다. 뇌의 회백질 부피가 감소하는 것입니다.

흔히 ‘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그 뇌의 회백질입니다. 신경세포가 모여 있고 회색빛을 띠지요. 회백질은 정서주의, 기억, 의사결정 등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에 기여하기에, 이 회백질의 부피가 줄어들었다는 건 좋은 징후가 아닙니다. 문제 해결에 필요한 하드웨어가 빈약해졌다는 뜻이니까요.

결국 자존감을 낮추는 여러 요인들은 뇌에 영향을 미치고, 뇌의 문제는 또다시 다양한 자존감 문제로 이어질 위험이 높습니다.

방금 ‘다양한 자존감 문제’라 말한 이유는 낮은 자존감이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취 욕구가 낮아지거나 우울증 같은 기분장애, 혹은 불안장애를 보일 수도 있으며, 자살 사고와 자살 시도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성취를 지향하는 야망이 지나치게 끓어올라 성공이나 완벽함 같은 특정 가치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 어린 시절에는 잠시 자존감이 높아 보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자존감이 낮아지게 됩니다. 운이 좋지 않아서, 혹은 나이가 들어서 야망에 걸맞은 성취를 하지 못하면 또 자존감이 곤두박이칠 치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다양할지언정, 이 다양한 양상을 관통하는 주제어들이 분명 있습니다. 성취, 그리고 야망입니다.

일상에서 흔히 쓰이던 ‘자존감’이라는 용어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가 1890년대에 처음 심리학 영역으로 끌어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개념입니다. 당시에 그는 자존감을 ‘성취 수준을 개인의 목표치로 나눈’ 비율 공식으로 정의했습니다. 이를 수식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존감 = 성취 수준야망

성취도 높고 야망도 높으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야망이 적절한 수준이라면 사실 자존감이 낮아질 일은 없습니다. 윌리엄 제임스 역시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공의 수준을 높이거나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기를 희생해가며 사회에 기여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더 강조하는 트렌드가 형성되었고, 아이들의 낮은 자존감은 추후 학업 실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섣부른 예측마저 생겨나 개인의 자존감에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개인의 현실적인 상황이라든지, 실은 적절한 수준이었던 원래의 야망은 무시한 채로 더, 더, 더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고, 그것이 멋진 사람, 건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의 특성이라고 선전하는 메시지가 만연해졌습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저 멋진 통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엉뚱하게도 자존감을 높이려면 성취를 해내야 하며, 그 성취를 위해선 더 큰 야망을 가져야 한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인생의 성공을 설파하는 자기 계발서 작가들의 ‘선무당식’ 진단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저조한 성취, 대인관계 문제, 심지어는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갖가지 심리적인 문제들이 모두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한다는 이론을 폭발적으로 퍼뜨리며 개인의 책임을 끝없이 물었습니다.

  • ‘당신이 더 노력하지 않은 탓은 아닌가요?’
  • ‘당신은 얼마나 치열하게 살고 있나요?’
  • ‘너, 그거 자존감 문제야.’

이제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자존감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인 흐름이었고, 심지어는 서너 살짜리 유아들의 자존감을 측정한다는 검사지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국에서도 IMF로 마지막 낭만의 시대가 끝난 2000년대 무렵부터, 성취와 실패를 개인의 자질 문제로 돌리며 그 사람의 자존감 문제를 추궁하는 분위기가 무한대로 확산되었습니다. 한편으로 개개인은 낮은 자존감을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점점 더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절대적으로 높거나 절대적으로 낮은 자존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강의 시간에, 높은 자존감이란 ‘착한 지도교수’나 ‘부모의 손이 필요 없는 아이’처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 속 동물인 유니콘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허상입니다. 시중에 범람하는 자기 계발서들이 말하는 자존감의 경지는 ‘굳이 이렇게까지?’ 싶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자존감이 그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높은 자존감이라는 프레임은 분명 허상에 불과하지만, 이 신기루가 우리의 자존감을 낮추는 경우를 너무 자주 보아왔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높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나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그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알고 있나요? 음, 이게 우리지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입니다. 물론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매일매일 위아래로 끊임없이 요동치는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떤 날은 스스로가 괜찮아 보이고(아마 당신은 하필이면 이런 때에 그를 만났겠지요), 어떤 날은 기분이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경험을 하면서 그저 버티며, 수습하며, 꾸준히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상태 자존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삶의 맥락과 고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자기 가치감을 뜻합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하는 유동적인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지각하는’ 자존감, 자기 가치감이 낮을수록 정신건강 문제의 위험성이 높아지는 경향성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새삼 돌아보면, 자존감 문제는 우리의 인격적 성숙도나 사회적᛫직업적 성취도가 한결같이 절대적으로 낮아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자신의 성취를 얕잡아보고 스스로를 하대하기 때문에, 남에게도 들이밀지 않을 엄하고 모진 잣대로 자기 평가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존감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너무나 노력하며 살아왔던 우리 스스로에게 조금은 너그러워졌으면 좋겠습니다. 판타지 소설이나 다름없는 자기 계발서 수준에서 내려다보면, 어차피 우리는 지금 다들 엇비슷한 자존감과 섀도복싱 중입니다. 어떤 날은 높아졌다가 어떤 날은 낮아지기도 하는 자존감을, 아무런 가치판단도 없이, 있는 그래도 편안하게 보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때로 타인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아 자존감을 높이는 경험을 한다면, 그건 또 그대로 좋습니다. 감사한 일이니까요.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게 될 위험이 있으니 아주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지만, 우리의 자존감은 사실 그런 식으로 높아지는 게 맞습니다. 본래 우리 뇌가 그렇게 작동합니다. 우리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는 부정적인 평가보다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저명한 신경과학자이자 미국 UCLA 심리학᛫정신의학᛫생물행동과학과 교수인 매슈 리버먼 박사는 자신의 대표 저서 《사회적 뇌, 인류 성공의 비밀》첫머리에 ‘청중의 반응에 반응하는 뇌’에 관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칭찬은 굉장히 쾌락적인 보상으로, 우리 자존감의 토대가 됩니다. 예를 들어 기분 좋은 촉감과 같이 즐거운 물리적 접촉에 반응하는 ‘뇌 영역’은, 칭찬처럼 자존감을 높여주는 기분 좋은 심리적 접촉에도 꽤 유사한 활성화 반응을 보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진 사람들의 뇌를 들여다보면, 보상적인 쾌락 경험과 관련한 뇌 영역이 자기 개념을 담당하는 뇌 영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칭찬을 들어 즐거움을 경험하면, 이것이 뇌의 쾌락 영역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를 처리하는 뇌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들은 이 연결성이 눈에 띄게 저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뇌의 연결 구조상, 칭찬을 들어도 그 칭찬과 자기 개념을 별개의 것으로 처리합니다. 긍정적인 피드백보다 부정적인 피드백에 더 집중하는 뇌 활성화 패턴을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좀 더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는데요.

이렇듯 일반적으로 우리 뇌는 누군가의 칭찬을 들으면 이를 보상적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또 이것이 자기 개념으로 연결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잔소리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좋은 평가나 칭찬을 받았을 때, 반사적으로 “아니에요”라고 답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이를 편안하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물론 갑자기 칭찬을 받으면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존감이 낮은 편이라고 생각해온 탓에 뜻밖의 칭찬을 하는 사람에게 다른 의도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듭니다. 늘 그래왔듯 겸손의 미덕을 보이려고 “아니에요” 소리를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아니에요”라고 하면 정말 아닌 게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말에 갇혀 ‘아니지, 내가 잘한 건 아니지’ 싶은 마음이 들어버립니다. 듣는 사람도 ‘어? 아닌가 보네?’ 싶습니다. 누군가 칭찬을 해주었는데 자꾸 정색하며 “아니에요”라고 반응하면, 주위 사람들은 점차 칭찬을 주저하게 됩니다. 어차피 아니라고 할 텐데 칭찬을 하면 뭐 하나 싶은 거지요. 그렇게 칭찬받는 빈도가 줄어들면, 우리는 어느 순간 또다시 ‘생각’에 빠져듭니다. ‘왜 아무도 나를 칭찬해주지 않지? 나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인가?’

뇌는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서 오는 신호들의 간극이나 오류에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이런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습관적으로 과소평가하고 타인의 의도를 곡해하는 악순환의 길로 들어설 위험도 높아집니다. 그러니 “아, 네, 말씀 감사합니다.”하고 그저 고마움을 표현하거나, “그렇지요?” 하고 웃어 보이는 연습이라도 이 악물고 해야 합니다. 하다 보면 늘어요. 누군가 당신을 칭찬하면 이런저런 생각에 머물러 불필요한 미로를 구축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즐거운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어릴 적 당신의 뇌는 그렇게 자연스레 작동했습니다. 어른들의 칭찬을 편안히 받아들이며 기분 좋아했습니다.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반복되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동안 부정적인 반응에만 작동했던 우리 뇌의 배선은 천천히 바뀝니다.

이번에는 정말 잘했을 수도 있습니다.
뇌를 그렇게까지 힘들게 하지 말아요.

Source: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