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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나듦- 통섭에 대하여, 최재천 교수

어제 김지수 문화 전문기자가 쓴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을 읽다 65P에서 최재천 교수님 얼굴을 보고 2013년을 떠올렸습니다. 2013년 첫 회사에 다닐 때 수능날 휴가를 내고 충남 서천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국립생태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한 최재천 교수님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죠. 당시에는 개관을 준비하느라 모두 분주했는데, 첫해부터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며 지역 경제를 살리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나긋나긋하게 제게 해주셨던 말들 중 일부를 다시 옮깁니다. 인간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유일한 종일까요? 이렇게 좋은 말씀을 직접 듣고 에버노트 한 켠에 저장해두었다 8년이 넘어서야 다시 읽어보며 "아" 고개를 끄덕입니다.

충남 서천, 정식 개관을 앞둔 국립생태원은 분주한 모습이었다. 아직 원장실에 손님이 있다고 해서 잠시 기다리는데 불안감이 스쳤다. 오전에 받은 전화 때문이다. “어떡하죠. 원장님 일정이 겹쳤어요. 같이 하셔야겠는데요” 대전일보에서도 2시에 인터뷰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일간지와 인터뷰가 겹치더라도 궁금한 건 다 묻겠노라 다짐하는데 문이 열렸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죠?” 악수를 권하더니 최재천 원장은 회의실은 새 집 냄새가 많이 나니까 원장실로 들라고 했다. 앞 손님이 나오자마자 기자가 들어섰다. 나오는 손님도, 들어가는 손님도 정신이 없다. 유독 그의 얼굴만 평화로웠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다는 사람, 최재천 원장의 첫인상은 ‘여유로움’이었다.

국립생태원 최재천 원장이 초등학생 어린이에게 상을 건네주기 위해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추고 있다. ©중앙일보
▲ 최재천

학력 서울대학교 동물학과 학사,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생태학 석사, 하버드대학교 생물학 박사

경력
2004년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2006년 이화여자대학교 생명과학부 석좌교수
2013년 국립생태원 초대원장

저서 《개미 제국의 발견》, 《통찰》, 《통섭의 식탁》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 등 약 70권

최재천 원장은 한국사회에 ‘통섭’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을 번역하며 학문 간 넘나듦을 의미하는 ‘Consilience’를 그는 ‘통섭’이라 번역했다. 이 단어를 찾기 위해 1년 넘게 고심했다는 그를 캠퍼스가 아닌 국립생태원에서 마주했다. 자신의 이화여대 연구실을 ‘통섭원’이라 부르는 그는 인터뷰 장소로 선택한 원장실을 ‘통섭 공원’이라 부르겠다고 했다. 학문적으로는 물론이고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에게 물었다.

통섭에 대하여

‘통할 통(通)’+‘쥘 섭(攝)’= “큰 줄기를 잡는다”

최재천

Q. 통섭이 무엇입니까?

굉장히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데요. 한 마디로 하자면 ‘담을 고치며’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에요.

담을 만들기 전에 나는 묻고 싶다  내가 무엇을 담 안에 넣고 무엇을 담 밖에 두려는지  그리고 누구를 막아 내려는지

로버트 프로스트 《담을 고치며(Mending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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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는 멋진 문장인데요. 그는 “담이 없으면 그건 한 집안이잖아요. 담이 있어야 이웃”이라고 했다. 그는 통합과 융합을 예로 들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담을 없애는 것에 속해요. 통합은 한 곳으로 다른 것을 합치려는 것이에요. 또 융합이라는 개념도 있죠. 기술의 융합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해요. IT(Information Technology), BT(Bio Technology)가 만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면 두 기술이 따로 있으면 안 되거든요. 완전히 하나의 기술로 거듭나야 하죠. 그래서 융합에서도 담이 없어야 해요

통섭은 다르다고 했다. 그는 통섭을 위해 담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담이 없으면 한 집안이지 이웃이 아니잖아요. 제가 서천으로 내려오면서 주말부부가 되었잖아요. 제가 “이제 주말부부 해야 된다”라 고 하니까 국회의원 한 분이 그러세요. “옛날부터 주말부부는 3대가 은덕을 쌓아야 이뤄지는 일”이라고. 나이들면 주말부부 되어야 부부애가 솟는다는 얘기도 있으니까요” 그는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로 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다만 한국의 경우 그 학문의 담이 너무 높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담을 넘어갈 수 있게 담을 낮춰야 해요. 생물학자인 제가 경제학자들하고도 같이 연구할 수 있고, 물리학자인 사람이 법학하는 사람하고 고민해서 법개정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는 다른 두 분야에서 ‘넘나듦’이 가능한 것이 ‘통섭’이라고 설명했다.

서로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상태(일명 상호허겁)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평화를 유지하게 만든다. 우리 인간은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이러한 힘의 균형을 깨고 홀로 거머쥐려는 속내를 내보인다. 그러나 내가 그동안 관찰해 온 자연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에서 제일 먼저 배울 게 있다면 이 약간의 비겁함이다.
최재천,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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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의 통섭

Q. 회사를 다니면서 어떻게 통섭을 할 수 있을까요?

답은 배움이었다. 최재천 원장이 대학총장들을 만나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대학마다 평생학습센터가 있잖아요. 수강생 대부분이 중년층이에요. 취미로 다니세요. 학교도 그 정도로 생각하고 운영해요” 대다수 대학의 평생교육원의 프로그램을 보면 백화점 문화센터와 유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이 개념을 좀 달리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생학습센터가 졸업생에게 평생 AS 하는 개념으로 가야 해요. 지금 일하고 계시지만 85세까지 있을 것 아니잖아요.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요즘 40대 후반이면 회사를 나온다고 해요. 10명 중에 1명 정도 임원 되기 어렵다는데 시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언젠가는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 거죠. 고령화 사회잖아요. 집에서 놀 수 없으니까 다른 직장 구해야죠. 이때 전혀 다른 직종으로 갈 수도 있어요”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미래학자들은 현재 20대들이 평생동안 최소 5개 정도의 직업을 갖는다고 예상하고 있다. “옮겨 다니는 거죠. 새로운 직업을 구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지금은 전부 개인의 몫이잖아요. 자기 시간 아껴서 공부하고 주말에 학원 다니고. 그걸 체계적으로 돕는 대학이 앞으로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모집할 때 쓰이는 단골문구 역시 바뀔지 모른다. ‘우리 대학에 오면 좋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다’가 아니라 ‘평생 동안 일 할 수 있게 AS를 보장한다’로.

대학은 첫 직장 구하는 것만 책임지고 나머지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는 강의할 때 학생들한테 학교를 고소하라고 말한다. 40대 중반에 첫 직장에서 나왔는데 굶어 죽겠다 싶으면 이화여대를 고소하라는 것. 평생 먹고 살 수 있게 가르쳐야 하는 곳이 대학인데 책임을 다 안 한 거니까 그럴만 하다는 것이다. 그는 취업률 높이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대학평가 기준 탓이라며 “그것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Q.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나중에 고소해야겠어요. 회사 다니면서 대학 다니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직장에 가야죠. 저는 대학이 쫓아다니면서 공부를 시켜 줘야 한다고 총장님들한테 얘기해요. 이대 나온 사람들만 해도 회사에 얼마나 많겠어요. 그 사람들을 이대가 찾아가서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제가 생각할 땐 이게 가장 바람직해요. 근데 아직 미래의 이야기죠. 그럼 대안이 무엇이냐?” 그는 독서라고 했다. 2011년, 《통섭의 식탁》이라는 책에서 그는 ‘기획 독서’를 이야기 했다. 그가 ‘기획 독서’라는 개념을 꺼내자 그 반대 개념으로 ‘취미 독서’라는 말이 생겼다.

많은 사람들이 취미란에 ‘독서’라고 쓴다. 하지만 그는 “정말 독서를 잘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힐링’이 인기를 끌면서 심각하지 않은 책들만 많이 찾아요. “어떤 사람은 “머리를 비우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라고 말해요. 책을 쓴 사람은 머리에 지식을 채우기를 바라며 책을 썼는데, 비우려고 책을 읽는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죠” 그는 기자의 표정을 읽었는지 “제가 김난도 교수하고 막역한 친구사이”라며 오해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진정한 독서란 ‘기획 독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가끔 ‘힐링’을 위한 독서도 필요하지만 모르는 것을 알아가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참독서라는 것이다.

그는 이어서 아픈 곳을 찔렀다. “심리학 전공하셨다고 했죠. 혹시 진화심리학에 대해 잘 아세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진화심리학이 크게 주목받고 있어요. 조금이라도 관심이 생겼나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장 진화심리학, 책을 하나 들고 덤벼 보라는 거죠. 그다음에 ‘양자역학’, ‘근대철학’도 말이에요” 그렇게 하나씩 지식의 영역을 책을 통해 넓혀 가는 것이 기획 독서이다.

Q. 양자역학, 근대철학을 책으로 접하면 어렵지 않을까요? 책과 더 멀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재천 원장은 “피아노 치면서 배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우연히 영감을 받아서 즉흥연주를 할까요?” 결코 아니라고 했다. 엄청난 연습을 한다는 것이다. “피아노는 치면서 배우는 거죠. 치면서 실력이 늘어요. 가면서 하는 거죠” 그는 ‘나노과학’을 예로 들었다. 어떤 사람이 ‘나노과학’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심오한 학문을 들여다보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노과학’ 책을 한 권 읽은 사람은 다르다. “자기가 뭐라도 아는 줄 알죠” 작은 관심이 생겨야 빠져 들고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분야로 빠져 든다는 것이다.

그는 독서만큼 자기 계발에 좋은 것이 없다고 했다. 한 권이라도 읽고 나면 뭐라도 아는 듯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하다가 관련 기사가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읽고 있는 경우가 있다. 지나가다 게시판에 진화심리학 관련 행사 포스터를 봤다고 해도 책 한 권 안 읽은 사람은 포스터를 봐도 자극이 입력조차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자신과 상관이 없으니까 그런 겁니다. 그런데 한 권이나마 읽은 사람은 “가 볼까?” 생각하죠. 가서 듣다 보면 더 알게 되는 거죠”라며 직장인에게 독서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Q. 원장님께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리저리 방황하면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 방황을 ‘아름다운 방황‘이라 하셨는데 직장인들이 방황해도 괜찮습니까?

(웃음) 제가 직장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대답하기 조심스럽네요. 저는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지금까지 대학교수로 살았으니까. 교수는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어요. 정확히 짜인 직장인의 삶과는 많이 다르겠죠. 직장인들이 자기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모르지만, 가끔 직장인들 중에도 제 강의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직장인들도 “아름다운 방황”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물을 예로 들게요. 예전에는 자기 우물 하나만 확실히 파면 그 우물만으로 먹고살 수 있었죠. 이제는 풀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복합적으로 변했어요. 개인의 삶에서도 직업이 5~6개씩 되니까 하나만 확실히 파고 멈추면 안 되는 거죠. 그다음 직장에서는 그 우물이 필요할지 모르거든요. 평소에 옆 우물도 힐끔 보기도 하고 관심 있으면 직접 파기도 하는 사람이 확실히 유리해진 시대죠.

회사생활이 힘들 거예요. 그런데 ”힘들어서 방황 못한다?” 이건 아니에요. 회사란 필요할 때까지 지원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내보내야 하는 거죠. “퇴직 후의 삶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스스로 해야 하는 거예요. 힘들더라도 방법을 찾아야죠. 그 일만 하다 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퇴직금 털어서 치킨집 만들어서 장사 처음 해보는데 망하면 노숙자로 살아야 할 수도 있어요.

Q. 제가 지금 휴가내고 인터뷰를 하는 중이라 더 우울해지는데요.

그러니까 그전에 지식의 영역을 넓혀야 하죠.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고 생각해요. 동호회 같은 모임도 방법이고 별의별 것들을 해야죠. 예전처럼 평생직장 개념이 아니잖아요. 안일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음 직장에 대한 준비를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생각하라고 하면 좀 위험한 일인지 모르지만 해야 해요. 이제는 기업들이 그런 의무를 가져야 해요. 우리 기업에서 사람을 내보낼 때 다른 어디에 가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돌보는 거죠. 기업이 해야 하는 새로운 역할이 될 것에요. 기업이 자기만 돌보면 고령화 시대에 퇴직하는 많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사회적 문제가 되기 때문이죠. 이제는 돌보는 걸 잘해주는 기업이 칭송받는 문화가 될 겁니다.

학습에 시간을 할애해서 기업 내에 학교를 만들어 주는 거죠. 공인회계사 같은 자격증 과정을 만들어서 회사에서 가르칠 수도 있겠죠. 기업이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거예요. 회사에 공헌한 사람들의 여생을 회사가 걱정해줘야 하는 시대가 온 거예요.

Q. 지금은 어떤 꿈을 꾸면서 살고 계신가요?

제가 가장 힘들어하는 질문이네요.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는 꿈이 없어요. 우리는 사회가 꿈을 강요하잖아요. 꿈을 키우라고. 그러면 삶이 너무 힘들어져요. 저는 살면서 원대한 꿈을 꿔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하다 보니 몇 가지가 잘 되었죠. 그런데 이게 “나는 이다음에 위대한 과학자가 되어서 노벨상을 타야겠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유학 가서 공부할 때도 “개울물에 첨벙거리면서 놀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꿈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냥 제 앞에 있는 일들, 좋아하는 일들을 열심히 하고 그걸 즐기면서 그렇게 잘 살아요. 지나치게 아이들에게 꿈을 강요하는 것은 부담스러워요. 저는 제 아들한테도 절대 꿈을 강요 안 해요. 그냥 재미있게 살라고 해요. 무엇인가를 하려고 오늘을 희생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수능날이니까 생각나네요. “아침에 일어나서 바지를 입는 순간을 즐겨라”는 문장이에요. 그냥 바지를 입는 것을 즐기라는 거예 요. 바지를 입고 오늘 뭘 해야 한다, 내일 뭘해야 하니까 오늘은 뭘 참아 내라는 게 아니고. 제가 그런 사람이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영어시험에서 읽은 지문을 기억하고 있겠죠? 저는 “재미있게 살면 된다”라고 생각해요. 그는 밖에 있는 손님을 보고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아, 지금 이 순간 제 꿈이 무어냐고 물으셨죠? 조금 정치적으로 답을 할게요 (웃음).

국립생태원을 영국의 큐가든 같은 세계적 수준의 생태연구기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3권의 책을 추천하고 다음 일정을 위해 손님보다 한 발 앞서 ‘통섭공원’ 문을 나섰다.

최재천 교수님은 국립생태원에서 과학적 인사를 하기 위해서 관찰을 계속 했다고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나는 과학이에요. 과학적 인사의 출발점이 뭔지 아세요? 관찰입니다. 다행히 저는 평생 관찰을 하고 살았어요. (웃음) 진화생물학자로 실험실에 가면 가장 먼저 도마뱀 관찰을 시킵니다. 제일 재미없는 동물이거든요. 그늘에 있다가 먹이도 잡고 짝짓기도 하는 그 느리고 느린 과정을 매일 보고 기록합니다. 나중에 그 일지를 보며 중요한 행동을 중심으로 정량화를 하죠.

제가 국립생태원에 있을 때 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했어요. 전부는 못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직원들 중심으로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했어요. 가령 행정만 했던 어떤 직원의 관찰 일지를 보니 꽃을 가꾸고 잡초를 뽑는 행동이 유독 많았어요. 그분을 과감하게 식물관리 연구실장으로 발령냈더니 입이 귀에 걸려 찾아왔어요. 은퇴하면 이런 일을 하려고 자격증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죠. 까맣게 그을려서 신나게 바깥일을 하니 그 즐거움이 조직 전체에 전염이 돼요."

최재천 교수님이 2013년에 추천한 3권의 책

1.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 문학과 사상사 | 2005년 개정 ©교보문

지금은 워낙 유명해졌죠. 제가 이 책을 7년 전부터 권했어요. 그 때부터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대출한 책으로 꼽히더라구요. 제가 저자를 만나면 분명히 공치사를 할 겁니다(웃음).  진화생물학자인 재래드 다이아몬드가 무기, 병균, 금속이 인류 문명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한 책입니다. 이 책을 다시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2. 《리오리엔트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 이산 | 2003년 ©알라딘

알게 모르게 의식을 지배하는 ‘서구 중심주의’를 벗겨 내려는 책이에요. 제목 ‘리오리엔트’는 ‘다시 아시아로’ 또는 ‘서구 중심주의 일변도의 패러다임을 바로 잡는다’ 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요. 저자는 19세기 세계경제의 중심은 아시아였고 그 정점에 중국이 있었다고 말하죠. 21세기에는 과거에 그랬듯, 아시아가 세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거에요. 근데 이걸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서양인이 바라본 시점이니까, “이렇게 되도록 가만히 보고 있을 것인가”라고 말하는지도 모르죠.

3.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음 | 푸른숲 | 2003 ©YES24

마지막으로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책을 하나 추천할게요. 호치민은 국군이 미군을 도와 싸울 때 적군의 수장이기도 했죠. 호치민 평전은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어요. 호치민이 워낙 가명을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죠. 저자는 이 평전을 쓰기 위해 무려 30년간 호치민을 조사했어요. 그는 주석이 된 후에도 호 아저씨라고 불리길 원했고 아직도 베트남 사람들은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불러요. 하노이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저를 수행하던 현지인이 길을 걷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는 거에요. 어딜가나 봤는데 사원 앞에 줄을 서요. 속으로 “예의없는 사람이구나” 싶었죠. 한참 후에 돌아오더니 그 곳이 호 아저씨를 모셔 둔 곳이라고 해요. 존경심이 대단하죠. 그러다 시장을 지나는데 호 아저씨가 즐겨먹던 국이 있으니 한 번 먹어 보라고 권합니다. 근데 그게 음식이 아니에요. 꿀꿀이죽 보다 더 못해요. 이 평전에서 호치민이 공산주의자였느냐, 민족주의자였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는 베트남을 위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둘 다였죠. 주석이 된 후에도 화려한 집무실을 마다하고 정원사의 오두막에서 살았다고 하는 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여다보길 권합니다.